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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기사입력  2022/08/10 [15:31] 최종편집   
▲안영혁 목사

 

(안영혁의 힐링칼럼)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코로나 감염이 시작되던 때에 뉴 노멀을 많이들 이야기했다. 이제는 그런 말 자체가 많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그 자체가 여기저기에 많이 자리 잡은 것 같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야 힘이 생기는 곳이다. 따라서 코로나 감염의 영향을 아마도 가장 크게 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다행스러운 것은 점점 비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도구적 이해가 높아져서 그에 대한 거부감이 획기적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의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감염 이후에 소소한 모임이 더 늘어났다. 전에는 멀리서 올 수 없어서 참여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모임 자체가 더 활발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뉴 노멀을 수용해 들인 셈이다.

 

그런데 교회의 자녀들을 대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요즘은 메타버스(meta-verse)를 활용한 교회 교육모임도 꽤 활성화되고 있지만, 더 살갑고 더 실제적이어야 하는 교육적 방법으로서는 뭔가 많이 부족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의 한 선언과 같은 일을 진행했다. 세대공감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교육이 중요한 만큼 매월 첫 주에 그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목사인 필자는 아이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설교를 마련하려고 보니,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말들도 꼰대의 말일 뿐이었다. 아뿔싸,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비록 충분한 도서를 가진 도서관은 아니지만,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총신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뭔가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말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바로 이 책을 찾아냈다. 야누쉬 코르착의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무려 1929년에 폴란드인 저자 코르착 생전에 출간되었다. 출간되고 90년이 넘은 책이다. 우리말 번역은 다시 독일역을 거쳐 중역된 것이다. 교육에 대한 실제적인 책이라 그리 오역이 있을 거로 보이지 않고, 의미 있는 책이다. 필자는 실은 이 사람을 그리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이 뜬금없는 책을 목사들의 언어로 하자면 성령님의 인도로 찾아낸 셈이다.

 

교육 이야기에 들어서면서 코르착이 꺼내는 말의 요지는 아이들도 생각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생각을 묻지 않고, 엄마와 아빠의 생각으로 뭔가를 결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은 이런 것이다. 어린 아기 때 아이는 자기 앞에 오는 모든 일을 연구하지만, 어른들은 그 모든 일을 에피소드로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연구하는 사람과 그것을 에피소드로 여기는 사람. 누구를 더 존중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연구하는 사람 아닌가?

 

필자에게 이 책은 엄청난 교육 사상서로 보인다. 요즘 이 책을 발견한 기쁨과 이것을 교회에 소개한 자랑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래서 교회의 자녀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그 생각을 좀 들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교회의 자녀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코르착이 말하는 자녀들의 권리 3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1.자기 죽음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 2.오늘 하루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 3.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어린이의 권리. 어린이들에게 자기 죽음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라니, 무슨 말인가? 어른들이 자꾸 아이들에게는 위험하다며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일이 너무 많고,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세상 경험을 곧이곧대로 하지 못한 채로 살아야 하는가? 그건 너무 답답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격한 언사인 것 같지만아마 코르착이 이런 말로 말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도 깜짝 놀라서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관심을 갖고 난 뒤에야 그 진정한 의도를 알게 되었다.

 

오늘 하루에 대한 권리란 아이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가 오늘 해야 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하고 오늘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유비무환일까? 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권리는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예쁘고 깔끔한 어린이로 있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부모의 뜻대로 온순한 아이로 살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인데, 이미 자기 생각을 가진 부모들이 뭔가를 결정하고 나면, 아이는 실은 멀뚱멀뚱 쳐다보아야만 하지 않는가? 이런 어린이의 권리를 생각하면서 같이 살고 또 교육하라는 것이 코르착의 말이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무려 백 년 전의 저서가 어찌 이렇게 신선할까 놀라며, 독자들에게 소개해 드린다. 일독은 생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안영혁(예본교회 목사,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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