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故 유선익 님 2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지혜
유선익님은 1923년에 태어나셔서 해방 때에 이미 청년이 되어 있으셨다. 소위 ‘해방둥이(1945년생)’로 지칭되던 분들이 지금은 고희(古稀)가 넘으셨으니 어르신께서 얼마나 고령이신지 새삼 느껴진다. 이때의 기억이 어르신께는 생생한 것이다.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신다.
내가 23세 때인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었다. 당시 만주 일대를 지배하던 일본은 패전국이 되어 모두 빠져나갔다. 현지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 복식을 불태우고 공산당이 들어오니 악수를 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이 공산당은 손이 반들반들하면 착취자로 여겨 죽이고, 손이 거칠면 살려준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해방 후 팔로군들이 들어오기 전에 퍼진 유언비어였는데 교직을 마치고 직장에 있었던 나로서는 바로 숙청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연길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즉시 남하할 것을 결심하고 동년 9월 1일 혼자 중국을 떠나 월남 길에 올라 9월 12일 청량리에 도착하였다. 45년 서울, 연고도 없이 덮어놓고 서울로 왔다. 당시 내가 살던 만주 일대에서도 젊은 사람은 다 넘어왔다. 발해학교 졸업생도 한 50명이 넘어왔다.
(유선익,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희망사업단 2016, 서울. 38~39쪽)
이렇게 거대한 시대적 격변기에는 한 번의 판단이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 되기도 한다. 만일 어르신께서 당시 연길에 그냥 머무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 아마 공산당에 관련된 활동을 하지 않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23세의 청년이 중국땅 연길에서부터 이남을 결행하여 서울로 오는 결심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단이 본인과 이후에 형성될 가족들의 거처와 운명을 결정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최근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불거진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나라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놀랍게도 어르신께서는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기 1년 전에 자서전을 통해 후세대가 어떤 입장에서 해방전후 현대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언급해 주셨다. 이는 진영의 논리가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여기에 한마디 쓰고 싶다. 역사는 정직하게 써야 한다. 공산당이라도 나라를 위해 싸웠으면 예우해야 한다. 해방이 되고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면서 38도선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진영이 나눠지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이념’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미주, 상해에서 독립운동 하던 이들도 귀국을 하였다. 당시 김구, 이승만 모두 돈이 없었다. 그때 해방 후 격변기의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이승만은 친일파 자금을 받았다. 노골적으로 받았다기보다 그냥 물어보지 않고 썼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 자금을 받지 않았다. 이북은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 글을 잘 안다고 정치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탁해진다. 탁해지면 협잡과 사기가 생긴다. 38선 이남에서는 해방 후에 못 먹는 놈이 병신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결국 김구 선생의 선거본부는 돈이 없어 약해지고 이승만이 점점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결국 선거 운동원들과 친일파들이 결탁하여 다시 세력을 얻었지만 그렇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하고 자녀들은 공부도 잘 못 시키게 되어 점차 힘이 약화되었다.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유선익,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희망사업단 2016, 서울. 38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로 이 세대가 다 사라지기 전에 하루라도 더 많은 기록들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역사는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일성(一聲)이 내내 가슴을 울린다. 역사 집필자들이 꼭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정직’에 대한 말씀도 그렇다. 정직하지 못하면 탁해지고 탁해지면 협잡과 사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지혜’이다.
이후 어르신께서는 먼저 월남했던 7촌 조카 ‘유길’의 집에 머물면서 광복군 직속 무관학교를 설립한다는 보도를 듣고 바로 자원입대를 결정하여 합격을 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청에서 한국 내 군사조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개교를 불허하고 결국 폐교조치 되었다. 이렇게 해방 전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쉬운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났던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일들이 언젠가는 이뤄질 ‘통일정국’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는 이런 국가적, 민족적 ‘후회’가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 철저하게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어르신께서는 광복군 무관학교에서 이후 설립된 한국 국방경비대 창설시 창설 대원으로 입대하였다. 하지만 군대가 잘 맞지 않았던 어르신께서는 이듬해 제대를 하고 새롭게 설립된 단국대 법학부에 응시하여 입학하게 되신다. 이 과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덕분에 육사 1기에서 8기까지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약 2개월 남짓 훈련을 받았는데, 육체적으로 고된 군대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힘겨웠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군의 초창기라서 체계가 없었고 의무병도 아니고 모병된 것도 아니라 제대하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할 뜻이 있어 새로이 창설되는 단국대학 법학부에 응시하여 입학하였다. 현재 종로경찰서 옆 천도교 수운회관이 단국대 모체였다.
(유선익,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희망사업단 2016, 서울.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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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