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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딛고 일어선 또 하나의 가족 ...
어르신 자서전: <가난은 내 삶의 지름길> 저자 김태곤 님(1부)
기사입력  2015/07/07 [17:23] 최종편집   

 

▲저자의 <가난은 내 삶의 지름길> 표지


어르신 자서전: <가난은 내 삶의 지름길> 저자 김태곤 님(1)

가난을 딛고 일어선 또 하나의 가족 ...

 

그리스가 사실상 국가부채를 갚지 못하면서 다시금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8IMF 구제금융을 통해 신빈곤층이 생기고 양극화라는 용어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더 폭넓게 많은 사람들이 절대빈곤의 절벽에 서서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40~1960년 사이에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 극심한 가난과 혼란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김태곤님도 1943년 전남 고흥군 동강면 장덕리에서 태어나 극심한 가난 속에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고흥군 동강면 장덕리 183번지이다. 이곳 관덕 부락은 약 80~85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해변을 끼고 있는 아담한 섬마을이면서도 농지가 많아 살기 좋은 부촌으로 소문난 마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바다가 보였는데 지금은 대포리와 망주리라는 곳에 댐을 막아 더 넓은 농경지로 변화되어 바다는 보이지 않고 현재는 차로 약 15분에서 20분 가야 바다가 보이는 곳이 되었다...아버님께서는 전처가 두 남매를 낳고 별세하심으로 저의 어머님과 재혼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처녀로 시집오셔서 아들만 5형제를 낳으셨다. 어려서 둘은 하늘나라에 보내고 삼형제만 남아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얼마 전에 71세 병환으로 중간형이 돌아가셨다. 3살 된 동생을 등에 업고 그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올 때 일이다. 출가한 이복 큰형님께서는 부산에서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 기관장으로 여수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큰형님 댁에 더부살이를 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가난은 내 삶의 지름길, 2014. 서울. 희망사업단,22,24, 25)

 

저자의 집이 가난하여 어린시절 이복형제인 큰형님께서 부산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어린 동생을 데리고 큰형님 댁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5식구가 살던 그 집에 이복동생 둘이나 부양하게 되었으니 큰형수가 이를 좋게 여길 리 없었다. 그래서 큰형수는 저자의 동생을 박대하여 어린 동생이 굶어 죽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큰형수도 급사하는 비극적 사건을 겪게 된다.

 

우리 가정에 이런 고난들이 수없이 닥쳐왔다. 불과 1~2년 사이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과 형수님까지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힘든 일들을 많이 겪으며 살아 왔다. 그러나 무조건 죽으란 법은 없었다. 형님은 새로운 형수를 맞이했다. 새 형수님은 6·25의 피해자였다. 현역으로 군 복무하던 중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세살배기 아들과 외롭게 살고 있던 중 전 형수님쪽 소개로 새 형수님이 우리 가정에 친한 친구 한 분과 함께 찾아오셨다. 새 형수님은 우리집 형편을 어느 정도는 알고 오셨겠지만,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줄줄이 누워 있는데, 그리고 자기 아들 하나를 더하면 여섯 명이나 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셨는지, 다음 날부터 두 팔 걷어 부치고 집안 구석구석을 치우시며 버릴 것은 버리며 말끔히 정리정돈을 하셨다. 우리도 신이 나서 돕기 시작했다. 가정에 웃음꽃이 피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윗글 30~31)

 

저자는 이렇게 큰 고난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게 된 것이다. 큰형님의 자녀, , 비슷한 또래의 조카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저자까지 배다른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 사는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자라고 있던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오신 큰형수님을 어머니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분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한다.

 

 

 

철 들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예비하셔서 귀하고 귀하신 분 천사 같은 소중한 분을 우리 가족에게 보내 주셨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형수님께서는 향년 93세로 2014년 정월에 소천하셨다. 필자 마음속에는 형수님을 늘 내 어머니처럼 존경하며 살아왔다.(윗글 33)

 

저자가 12세 되던 해 큰형님이 몸이 편찮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앓아 눕게 되어 저자는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부산 남포동 부두에서 석유 배달원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다 너무 어려서 무거운 석유통을 들고 뛰어다니지 못해서 다시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였다. 그렇게 1,2년을 지낸 뒤에 고향으로 8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형님의 배려로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육촌형님 댁에서 일을 도우며 품앗이를 했다.

 

이듬해는 오촌 당숙댁에서 살았다. 참으로 험난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한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보수로 3년 동안 기술을 배우며 10대 후반부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 제대로 된 교육과 양육도 경험하지 못한 저자는 196220세가 되면서 군입대 영장이 나와 27개월간 군생활을 하게 된다.

 

제일 먼저 기술을 가르쳐주신 은사님의 집에 먼저 들렸다. 그러기 전에도 휴가를 나오면 손이 모자랄 때 가서 도와 드리면 휴가비도 좀 주시곤 했다. 주인댁에서는 제대할 무렵부터 모든 것을 정리하고 광주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는데 그즈음 나보고 사업체를 인수하여 운영해 보라고 했다. 돈 벌어 놓은 것은 한 푼도 없는데 말이다...사람은 인덕이 있어야 한다는데 이때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였던 것 같았다...많은 고민을 하다가 나의 형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그때 우리나라 돈이 환에서 원으로 막 변경되었을 때였다. 쌀 한가마니에 200원 할 때였으니까, 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얼마까지면 인수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했다...쌀로 100가마니가 넘는 금액(2만원)이었다. 저에게 의인이셨던 주인댁은 우리 형편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좋은 조건으로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반만 현찰로 내고 나머지는 벌어서 1년 후에 갚아 주라는 것이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욕심을 낼만한 조건이며 사업하기 좋은 자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형님이 주인아저씨께 찾아가 돈은 내가 마련해 볼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당부하시고 가셨다고 한다. 이때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세상 삶에 첫 걸음이었다. (윗글 55, 57)

다음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2015년도 관악구 어르신 자서전 제작자를 모집합니다.(5명 내외)

문의 : 희망사업단 010-9204-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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