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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산 증인
기사입력  2015/06/08 [18:13] 최종편집   
▲해군사관학교 입학기념 사진

 

 ■어르신 자서전: <나의 뿌리와 내 삶의 흔적> 저자 최창락 님
대한민국 해군의 산 증인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이 해전을 기록한 영화가 곧 개봉한다. 지금도 남북한의 긴장상태는 그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세계 굴지의 해양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60년 전만해도 전후의 참사에서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를 써내려간 증인이 바로 최창락 님이시다.(예비역 해군 대령) 저자는 1935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나 41년에 경남 고성으로 귀국하여 정착한다. 48년에 마산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중학교 졸업 이후 마산고에 진학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중 해군사관학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다.

 

6·25 사변 동안에 마산 해안부두에는 미 해병이 주둔하였고, 시내에는 미군 병사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신마산 일대는 술집, 카바레, 위락시설이 즐비한 기지촌 풍경이었다. 학교에 등교한 친구 중에는 미군 부대 안에서 일명 ‘하우스 보이’로 불리며 심부름하던 아이들도 있었고, 입은 옷은 대부분 군복을 개조해서 염색, 탈색해서 입고 있었다.

 

우리 집은 경남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농촌에서 논 15마지기(3,000평)를 영농했는데 그 동네에서는 중산층이었지만 자식을 외지에 보내 유학시키기에는 가난한 형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귀가해서 부모님께서 챙겨주시는 쌀과 반찬을 어머님이 머리에 이고, 내 등에 짊어지고 20리(4Km) 고갯길을 걸어서 반성 기차역이나 배둔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갈 수 있었다...나를 태워주시고 돌아가시던 어머님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대학진학의 꿈으로 부풀었고 문과반은 인문계로, 이과반은 이공계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망했다. 나도 문과반 공부를 해서 서울대 법대를 지망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차 학교 게시판에 각 군사관학교 생도 모집광고가 게시되었는데 내 눈에도 들어왔다. 사관학교 입시는 일반대학보다 앞서 치러지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 모였다. 나도 해군사관학교 지원서를 내고 진해로 가서 시험을 쳤는데 우리학교에서 47명이 응시했던바 나 혼자 합격이 되었다.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앞서 지원서를 내놓은 서울대 법대 지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는데 일반대학 입시 일자는 12월 15일 이후이고 해사 입교소집 일자는 12월 12일 이었다. 입교하면 나와서 일반대학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 되었는데 집안 형편으로 서울로 가서 4년간의 대학생활을 지탱하기가 매우 벅찬 일임을 생각할 때 사관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나의 뿌리와 내 삶의 흔적 2014. 서울. 희망사업단,47~48쪽)


요즘도 사관학교는 인기가 많이 있지만 전쟁 직후에도 대단한 경쟁률을 기록했던 것 같다. 특히 학교에 입학한 뒤에 훈련을 거쳐 최종 입학자를 선발하는데 그중에서 17%정도가 탈락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엄격한 선발기준을 유지했던 것 같다.
 
1953년 12월 12일 해군사관학교 정문에서 아버님의 손을 놓고 입교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50:1의 경쟁률을 뚫고 모인 신입생 180명을 4개 소대로 편성하여 12주간의 기초특별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고된 훈련이었다. 민간인의 때를 벗기고 참된 군인의 길을 인도하는 훈련이기에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12주의 훈련이 끝나고 나니 훈련을 못 견디고 도중에 30명의 탈락자가 생기고 정식 입학식이 있었던 1954년 4월 1일에 150명 만 1학년에 정식 입교하게 되었다.(윗글,48~50쪽)

 

1학년인 ‘보톰클래스’를 잘 넘기고 적응을 하여 4학년이 되어 원양항해 실습을 동남아 지역으로 떠났다. 당시에 우리나라보다 잘 살던 필리핀, 태국 등을 거쳐 베트남도 다녀갔다. 해외여행이라는 말도 생소하던 시절, 국제적인 교류를 ‘군 엘리트 교육’ 차원에서 시행하였으니 상당히 앞선 교육이라 할 수 있겠다.

 

졸업을 앞두고 1957년 10월에는 원양항해실습을 가게 되는데 함정에 승조하여 동남아 국가인 대만, 비율빈(필리핀), 월남, 태국 등지를 순항하는 함상실습을 통해 자신의 적성을 시험해보는 계기가 되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 생도는 해병대로 가게 되는 진로결정의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4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1958년 봄 4월에 벚꽃이 만발한 진해만에서 졸업식 및 임관식이 거행되었는데 입학식에 150명이 입교하여 111명이 졸업하고 임관하게 되었다. 그중 해병대로 30명, 해군 항해과로 50명, 기관과로 31명이 각각 임관하게 되어 배속되었다. 나는 기관과를 희망하여 임관 후 해군 종합기술학교로 가서 12주간 함정 기관 전반에 걸친 실무교육을 받고 함대에 배속하여 함정에 증조하게 되었다.(윗글, 51쪽)

▲606 함 기관부승함 기념

 

1958년 함대 LSM 603(상륙함)에 배속되어 초급 장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저자는 기체 정비와 보수 업무부터 시작하여 소형함정의 기관장을 거쳐 대형 해상 초계함의 함장까지 지내며 이후 8년간 동해와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수호하였다.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NLL 수호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에 한번 출동하면 한 달 보름정도를 쉬지 않고 승선하여 보내야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고된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여가 흐른 뒤에 혼사가 오가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 2015년도 관악구 어르신 자서전 제작자를 모집합니다.(5명 내외)
● 자서전 아카데미 &#8211; 일시 : 6월 9일~7월 7일(매주 화요일 오전 10~12시) 
● 문의 : 희망사업단 010-9204-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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