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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련 그리고 제2의 고향 관악에서...봉사의 삶을 살게 된 윤흥규 님
어르신 자서전: <두 개의 고향> 저자 윤흥규 님 3부
기사입력  2014/12/08 [15:32] 최종편집   

 

▲인터뷰하는 저자


어르신 자서전: <두 개의 고향> 저자 윤흥규 님 3

전성기, 시련 그리고 제2의 고향 관악에서...봉사의 삶을 살게 된 윤흥규 님

 

저자는 1사단 헌병대에서 미8군 헌병사령부 제2범죄수사대로 배속되어 전시 상황에서 군 보급품 관련 범죄를 단속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미 헌병대에 배속이 되니 모든 군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음은 물론 출범한지 얼마 안 되는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협조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생긴 것이다.

 

전쟁 중에서 얻게 된 권한은 실로 상상이 잘 안될 정도였다. 1년이 넘게 미 헌병대에서 근무하면서 미군과의 소통이나 협력에 많은 부분 익숙하게 되었다. 전선에서는 끝도 없는 고지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1952년 말 미국 대선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공약으로 한국의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겠다고 하였으며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그 약속대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2122일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이 일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작전이었다. 당선자의 방문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만큼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의 종식이 중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대통령이 탄 차 바로 뒤의 짚차에서 따라가며 경호를 하였다.

내가 발탁된 이유는 그동안 헌병단에 있으면서 일처리를 깔끔하게 잘했다는 평가를 받아서 중임을 맡게 된 것이다. 그날의 기억은 일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아무 연고 없는 서울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2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정말이지 고향에서 월남할 때는 상상초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 군 생활에 있어 그 때보다 더 강렬했던 순간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경호와 방한 일정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잘 마무리 되었다. 우리로서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미8군에서 인정받는 요원이 되었고 전쟁이후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두개의 고향, 윤흥규, 102, 108-109, 희망사업단, 서울 2014)

 

1953년 휴전 협정이 이행되어 전쟁이 끝났지만 오히려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3년여 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남북한 전역은 거의 초토화되고 산업 기반시설이 다 붕괴된 상태에서 전후 재건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미군이 있었다. 저자는 전후 질서 유지와 복구에 미군과 한국정부 사이에 가교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부양할 가족도 없고 하니 돈을 쓸 곳도 없고 쌓여만 갔으며 군 수사관에게 배당된 검은 세단을 타고 다닐 정도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내 방에는 TV와 냉장고가 있었다. 우리 집 건물주도 없었던 최신의 가전제품이었다. 내가 세들어 살던 집 주인은 인천 세관장이었다. 옆집은 공병단장이었고 그 옆집은 검사장, 교장 등 고관들이 살던 동네였다. 생필품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 여름에 나는 미군 부대에서 가져온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곤 했다. 한참 더운 여름이면 고관 부인들이 내가 퇴근할 때를 기다려 집에 찾아온다. 그러면 아이스크림을 한 사발씩 퍼주면 먹고 가곤 했다. (윗글 113, 114)

 

 

종전 후 수년간을 미군부대에서 생활하면서 여유로운 시절을 보내던 저자는 30대가 되면서 결혼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저자는 광화문에 가게를 차려 투 잡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숙대 음대 성악과 출신의 미모의 여성을 소개시켜 주었다. 장충동에 살고 있는 중견 가문 출신이었다. 신부감 되는 아가씨는 졸업 후 항공기 승무원 생활을 하다 신부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이렇게 좋은 집안 신부와 화려한 결혼식을 하고 회현동 경서맨션에 신혼집을 차렸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시절이었다.

 

 

생애 다시없을 화려한 결혼식을 한 뒤에 우리는 처가에서 마련해 준 회현동에 있는 경서맨션에서 신혼집을 차렸다. 우리 신혼살림에는 독일제 피아노가 있었는데 당시 국내에 몇 대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당시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거의 타워펠리스에 사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초현대식 건물에 사는 것을 의미했다. 신혼 생활은 꿈만 같았다. 우리는 퇴근 후 명동에서 만나 산책도 하고 외식도 하며 여유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이 나의 전성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윗글 117)

 

이렇게 저자의 멋진 결혼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원인은 불임이었는데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저자는 크게 괘념치 않고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는데 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여성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일까? 40대에 암이 발병하여 결국 황망하게 소천하게 되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40대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남 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성실하게 살았는데 갑작스런 아내의 소천은 내 삶의 큰 지주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깊은 상처를 주었다. 얼마 후 처가에 가서 장인어른을 찾아뵈니 나에게 여기 오지 말고 애도 없으니 재혼해서 자식을 보라고 권고하셨다.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 빠져 직장을 사직하고 자살을 결심하였다. 살던 집을 팔아 현금으로 다 바꿔버린 뒤 그 돈을 배낭에 넣고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이 돈을 다 써버리고 죽어야 겠다고 다짐을 하고...(윗글 120)

 

정말 죽음보다 깊은 절망에서 자살 직전에 어머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자살 결행을 그치고 유일한 연고인 이모님이 사시는 관악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40대 초반에 일과 가정을 잃고 관악에서 죽지 못해 삶을 유지해야 했다. 한참을 일할 나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거의 수개월을 무력하게 지내고 있다 보니 동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70년대 관악은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 많았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집들과 혼잡한 골목은 산업화로 발전되고 있는 서울의 뒷모습이었다. 아직도 일자리가 적었던 시절, 동네에는 주먹 좀 쓰는 이들이 돌아다니며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직은 젊고 의기가 있던 때라 동네 방범대와 정화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할 일도 없고 가족도 없이 혼자 있으니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윗글 124)

 

▲서예 교육 장면

 

관악에서 10년간 봉사만 하며 40대를 다 보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정화위원장, 새마을 금고 이사장, 조기축구회장, 산악회장 등등...그렇게 봉사하며 분주하게 살다 보니 새로운 삶의 희망도 생기고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한국상담심리학회를 설립하여 현재의 관악구청 근처 청룡동에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남들은 60에 은퇴할 때 저자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 십여 년 일하다 70이 되면서 틈틈이 연마했던 서예실력을 바탕으로 남정 서예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봉직하며 관악구 주민자치센터에서 서예 강사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십수 년째 지속하고 있다.

 

60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서예가 70세가 되어 꽃이 피었다. 남정서예원을 개설하고 관악구 관내 5개 동에서 매일 서예 강습을 시작하였는데 어느덧 16여년이 가까이 되어간다.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봉사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계속 봉사할 수 있는 건강과 기회가 주어진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특히 제자를 둔다는 것은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중장년층이 주로 내 제자들인데 성실하게 배우고 스승 대접도 해주니 말년이 심심치 않아 좋다. 덕분에 연말이 되면 무척 바쁘게 지낸다.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작은 선물도 마련하고 하루 날을 잡아 조촐한 파티도 우리 서예원에서 진행한다.(윗글 133)

 

이렇게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시련을 극복한 저자는 오늘도 60대 젊은 노인과 같이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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