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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후(前後), 그리고 미군 - 탈북 후 ‘조선민족청년단’에 들어간 윤흥규 님
어르신 자서전: <두 개의 고향>저자 윤흥규 님 2부
기사입력  2014/12/01 [15:24] 최종편집   

 

▲조선민족청년단 모습


어르신 자서전: <두 개의 고향>저자 윤흥규 님 2

전쟁 전후(前後), 그리고 미군 - 탈북 후 조선민족청년단에 들어간 윤흥규 님

 

지난호에 이어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급속하게 공산화가 진행되어 가고, 지역의 유지였던 윤흥규 님의 가족은 졸지에 가산을 몰수당하게 된다. 이에 분개한 저자는 고향에 살기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탈북을 결행하게 된다. 정주에서 이남의 통로인 해주까지는 300km정도 되는 먼 길이었다. 하지만 청년이었던 저자는 과감하게 실행에 옮긴다.

 

일단 새벽에 정주읍으로 출발했다. 10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려 새벽기차를 타고 해주까지 내려갔다. 해주에서 나는 월남행 배를 잡아탈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주까지 순조롭게 가게 되면서 고향을 떠나는 슬픔보다는 새로운 곳을 향한 설렘과 두려운 마음들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오후에 도착한 해주역에서 개찰구를 나오려는 순간 보안요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내가 월남을 하려는 사람인 줄 단박에 알아채고 보안서로 인계한 것이다. 당시에는 나같이 월남을 하려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보기에 평북에서 내려온 타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졸지에 월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보안서로 끌려오니 나는 정말 이 나라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절대 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해주에서 다시 정주로 이송되어 덕언면 주재소(오늘날의 지서) 유치장에 구금이 되었다. 그나마 고향에 있는 유치장에 갇힌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나를 빼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았다. 마침 외삼촌께서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에 있는 교원대 교수로 계셨는데 그분께서 힘을 써주셔서 각서를 쓰고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유학파 교수는 대단한 사회적 엘리트 그룹에 속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치장에서 나오면서 이남에는 다시 안가겠다고 각서를 쓰고 석방조치가 되었다. (두개의 고향, 윤흥규, 59-60, 희망사업단, 서울 2014)

 

1차 시도가 좌절되면서 저자는 일주일 동안 집에서 칩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보다 더 나쁘게 변해버린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탈북을 감행한다.

 

아마도 이 시대에 남쪽으로 간 사람들이 탈북 1세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거의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탈북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 기구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시도 역시 과정은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주에서 해주로 가는 최선의 교통

수단은 철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해주역이 다가오자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도 잡히면 거의 끝이라 생각하고 결연한 의지를 다져 보았다. 개찰구가 나왔고 군경의 감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나는 말끔하게 입고 친척집에 놀러온 것처럼 하여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전에 조사하기로는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얼마 후에 외지인들에게는 월남(越南)을 주선해 주는 노파가 나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두리번거려서는 안된다. 자칫 월남을 도모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해주는 이남(以南)으로 가는 서쪽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그만큼 경계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500여미터를 걸어가니 뒤에서 한 노파가 다가와 물었다.

총각, 월남할 건가?”

그 말을 들으니 온 몸에 전율이 오면서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는 생각에 긴장과 흥분이 교차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평정심을 잃으면 안된다 여겨 침착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나를 한 하숙집으로 인도하였다. 여기에서 해가 지고 모두가 잠이든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대기하였다. 할머니는 새벽 한시에 올테니 한숨자고 있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긴장감에 쉽게 잠이 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느덧 스스르 잠이 들었는데 드디어 할머니가 안내자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안내자가 조용히 나를 불러내었다....

배를 타고 출발한지 십여 분이 지나자 육지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경비대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기관총을 발사한 것이다. 뱃사공은 급히 엎드리라고 소리쳐 나도 순간 엎드렸다. 정말 살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더 이상 총알이 미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드디어 긴장된 순간을 지나 건너편 육지에 닿았다. 어디냐 물으니 해주 발악 주재소라고 했다.

(윗글, 63)

 

그렇게 배삯 1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저자는 해주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기서 간단한 월남 경위를 진술한 뒤에 서울로 향할 수 있었다. 당시 저자는 이렇게 몇 년 정도만 서울생활을 한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이 고향과는 영영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1949, 내 운명의 나침반은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23세가 된 패기 넘치던 청년 윤흥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해주 발악에서 차로 이동하여 기차역으로 갔고 여기서 부터는 나 혼자 가야 했다. 워낙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경찰들은 그저 오는 사람을 등록만 할 뿐 특별히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서울에 연고하나 없이 무작정 넘어왔기에 거주지 주소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고향집 주소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윗글, 68)

 

 

저자는 아무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삼거리에서 운명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오른쪽은 한강, 왼쪽은 남대문, 앞쪽은 후암동 방면 언덕길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직진하여 후암동 쪽으로 갔고 거기서 운명적인 간판을 보게 된다.

 

낯선 서울에서 일단 머물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가급적 하숙집이나 여관 비슷

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조금 들어가다 보니 한 집에 民族靑年團이라는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뭔가 내가 가야만 할 곳이라 생각되는 느낌이었다....당시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이 어떤 단체인지도 몰랐다. 그저 청년이라는 말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나도 조선민족의 청년이었으니까 당연히 나도 해당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이에 이북서 내려와 서울역에 좀 전에 내려 우연히 간판을 보고 들렸다고 하였다. 아마도 민족청년단(‘족청이라고도 했다)의 지부가 거기에 있었던 이유도 나 같은 젊은이들이 이북 각지에서 서울로 내려와서 처음으로 오게 되는 곳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워낙 방문자가 많아서 그랬는지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고 지부장을 만나게 해 주었다.(윗글 74,75)

 

이렇게 민족청년단에 들어간 저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극심한 좌우 대립의 현장에서 행동대원으로 우파 민족진영에서 활동하게 된다. ·우익 청년들은 계속 물리적인 충돌을 이어갔고 북에서는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있던 저자는 전쟁이 갑자기 발발할 것이라 생각도 못한 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단원들은 즉시 군대로 편입되었고 저자도 1사단 헌병대 장교로 입대하게 된다. 이후 낙동강까지 밀리는 처참한 상황 속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진하게 되면서 다시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이후 저자는 헌병대의 특성상 북진에 동참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치안 유지 등의 업무를 하다가 1사단 헌병대에서 미8군 헌병사령부로 배속되게 된다. 갑자기 미군으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저자는 유복했던 어린 시절에 이어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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