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출 칼럼)
고통 속에 발전하는 민주주의
요즘은 신문의 정치면을 펼치기가 두렵다. 야당은 독점적 의석을 등에 업고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며 비판하는데, 여당의 대응은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여와 야가 서로 정책 대결을 하며,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국가의 안위와 경제적 발전을 위해 대안을 찾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양보와 타협을 하는 것을 정치라고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을 쓴 이영희 교수는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라는 예언적 명언을 남겼다. 실제로 진보성향의 야당이 의석을 과점하면서, 신문의 정치면을 보면 이 교수의 말처럼 아슬아슬한 ‘불안감’을 느낀다. 이 교수가 예언한 것처럼 안정감을 잃은 채, 전진하지 못하고 빙빙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를 돌기 때문이다. 경제는 작더라도 발전이라는 관성이 작용하지 않으면, 풍요로움에 길들어 있는 국민의 박탈감은 더욱 커지게 된다.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문제가 없지만, 그 반대로 부자가 조금이라도 가난해지면 불행감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는 ‘경제 호황’조차 100% 찬성하지 않는다.
1998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우리는 7% 이상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기업의 접대비는 매년 8000-1조원 정도에 이를 정도로 풍성했다. 유흥업소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소비가 급속히 늘어나서 ‘잘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성장률은 3% 내외로 하락했다. 2010년 다시 6.8%의 고점을 찍었지만, 그 후부터 2% 언저리를 계속 해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풍요의 시기를 거쳐 왔던 세대들은 ‘긴축과 절약’이 유난히 견디기 힘들다. 흥청망청 신나게 소비하고, 일자리가 넘쳐났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경제’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상대로 홍보하고 표를 얻기 위한 ‘만병통치약’과 같은 것이 되었다. 어느 나라든지 경제 호황기에 선거를 하면, 집권당이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 미국의 바이든이 마지막까지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호황 정책에 매달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연준(FED)이 금리를 대폭 인하한 것도, 대선을 의식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니, 여야가 협력하여 국가 경제가 발전하는 정책에 호흡을 맞추기 힘든 것이다. 도와주면 집권당만 유리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역할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따라, 리더십을 검증받게 되는 것이다. 여야가 정책 대립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런 갈등을 풀어내고, 분열을 단합과 시너지로 전환시키는 리더십을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행정의 수반인 대통령은 오직 국민을 바라보면서, ‘안정적 외교와 경제 성장’이란 성과물을 통해 검증받는 것이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란,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대의(大義)를 위해, 한신은 수과하욕(受袴下辱)을 기꺼이 감수했기에 초나라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본다’는 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정치판이다. 그러나 국민은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과 달리 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가장 선호한다. 여당과 야당이 정쟁을 하더라도,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재를 뿌리는 과오를 범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국익 앞에서는 단합하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풍토를 만들 책임이 국민에게 있다.
∎민주주의 위대성은 99%가 찬성하고 1%가 반대했더라도, 그 1% 국민의 의견과 인권을 존중하는데 있다.
1938년 독일의 히틀러 정당은 98.68%의 득표율로 집권했다. 그 결과 히틀러는 국민의 전폭적지지 아래 독재를 합법화했다. 그 결과 인간의 천부적 인권은 걸레처럼 버렸고, 광기와 공포 그리고 인권이 파괴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1%의 소수 의견이라도 짓밟거나 묵살하지 않고, 주장을 굽히도록 협박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을 활용하는 정치인들은 이런 건강한 사회구조를 싫어한다. 민주주의가 시민권으로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둔 것은, 절대권력(높은 지지율의 중앙정부, 독점 정당이 지배하는 의회 등)에 의해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이런 헌법적 권리와 다양한 자정 장치들이 작동될 때, 그 건강성을 유지하게 된다. 한양대 이영희 교수는 오늘의 정치 현실을 예견하신 것처럼 이런 말을 남겼다,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증오의 정치’는 바로 ‘좌’와 ‘우’ 모두가 경계해야 할 사회적 병”이다‘. 그분이 걱정한 ’증오의 정치‘를 우리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정치인들 뿐 아니라, 국민조차 ‘좌편’과 ‘우편’으로 갈라선 상태다. 마치 조선시대 노론, 소론 등으로 갈라져서 당파싸움을 했던 그림자와 겹쳐진다. 고교 졸업자의 70%가 대학을 가는, 전 세계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은 나라가 지성과 지식이 부족할리 없다. 문제는 그들조차 상대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회현상이다.
‘메타인지의 힘’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어리석을수록 자신이 우매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인지편향에 빠진다. 즉 지식이 부족할수록 적극적으로 배움을 거부하는 성향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무지가 아니라 무지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인지적 게으름과 오만이 문제이다. 오만은 무지와 확신의 결합이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정보만 수집한다’는 인지편향이 중독된 것 같다. 이런 현상이라 말로, 포퓰리즘의 선동 선전에 의해 주도되는 ‘증오의 정치’인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술을 마시다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술판을 뒤엎고 싸운 이야기’는 진부할 정도다.
서로 자기주장만 하면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불통의 지옥에 살고 있다. ‘무지와 확신’이 결합하면 오만을 만들고, 오만한 언어는 우정(友情)도 깨고, 부모 자식이 싸우고 부부를 서먹하게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 ‘믿음과 신뢰’가 존재하며, 참된 평화와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이 간단한 말 속에, 정치의 지혜가 담겨 있다. 결국, 타자(他者)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야 말로 지옥인 것이다. 이런 세상을 향해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했다. ‘나와 다른 의견을 포용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화합’하는 태도야 말로, 공자가 말하는 21세기 민주주의 정수(精髓)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