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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의 힘 – 통역병이 되다
기사입력  2018/02/08 [16:56] 최종편집   
▲ 비둘기부대

어르신 자서전: 2017년도 제작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5)
국어의 힘 통역병이 되다

 

비둘기 부대로 신규 배치되어 온 사람은 50여명 정도 되었다. 신병들이 영내 연병장에 모여 있는데 참모장인 대령이 와서 영어할 수 있는 사람 손들라고 하였다. 카투사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던 나는 주저하며 손을 반쯤 들었다. 나는 그래도 몇 명은 되려니 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손 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이에 나는 참모장실로 불려가게 되었다. 그분은 나에게 서툰 영어로 질문을 했다. 영어로 계급이 뭐냐?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잔뜩 긴장을 했는데 막상 들어보니 그다지 잘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에 내가 카투사에서 있으면서 암기했던 복무원칙을 이야기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카투사 복무할 때 영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뜻도 모르고 외워서 한 단계 레벨업이 되는 경험을 하였는데 이번에 제대로 써 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8군 수칙은 군사영어이기 때문에 일반인도 왠만큼 영어를 하지 못하면 잘 모를 정도로 전문적인 내용도 있었다. 내가 영어로 줄줄 말하는 것을 듣더니 됐어, 됐어, 그만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군수, 보급 담당자로 임명을 하였다.

주월 한국군의 모든 보급을 미군에서 받았고 그 과정에서 영어는 필수였다. 이에 비둘기 부대의 보급품을 미군에서 받아오는 수령담당을 하라고 한 것이다. 보급품을 수령하려면 당시 영어로 된 영수증인 Invoice를 이해하여야 했다. 나는 운전병과 함께 트럭을 가지고 미군 보급대로 가서 한국군으로 보급물품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다. 보직 중에서는 매우 수준 높은 보직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급병 역할을 6개월 하는데 월남어 통역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월남어 교육대는 한국군 부대에 1~2명을 배치하여 현지인들과 교류, 소통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 요원이었다. 월남어 교육대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 영어-월남어 시험에 통과한 사람들에 한해서 추가 통역수당을 받았다. 통역수당으로 50불이 더 붙었는데 당시 월남에서 받는 병장봉급이 54불이었으니 적지 않은 것이었다. 월남어 군사어학 학교 선발 정원은 장교9, 사병 9명이었다. 몇 명이 지원했는지는 모르지만 비둘기 부대에서는 내가 선발되었다. 거기엔 미군, 한국군,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 참전 7개국 출신 군인들이 같이 받았다. 그 중 상위권인 1~9등은 늘 한국군이었다.

월남말이 문법은 영어와 체계가 같다. 18세기에 프랑스 선교사가 근대 월남어 문법 체계를 만들었는데 한 100여년을 사용하지 못했다.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단어를 중국에서 가져왔다. 예를 들면 동서남북은 동타이남빠, 학생- 헉신, 고모 꼬 등으로 발음을 하니 한자 문화권에서 자란 우리가 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군사어학학교를 졸업하여 통역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에 월남어 통역관 인원은 매우 부족하였다. 이에 통역요원들은 다시 각 부대에서 3~40명을 선발하여 월남어 요원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켰다.

나는 비둘기 부대에서 복무를 하다가 월남어 교육대로 전출되어 언어 교육을 받았다. 매우 생소한 것이었지만 젊었고 의욕이 넘쳤기 때문에 교육을 잘 수료할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방첩대로 배치되었다. 지금은 기무사 소속이다. 방첩대 안에는 비엔호아(Vien hoa) 성에서 월남 경찰 2명이 파견을 나와 있었다. 파견 나온 경찰은 내가 전담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부대 내에 월남 민간인이 80여명 정도가 있었다. 그들 중에 신원 조회를 하고 최종 선발을 하는 역할이 방첩대의 주요 업무였다. 월남인들 취업에 대한 정보판단권이 나에게 있었으니 갑자기 주요 인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월남에는 한국군 5, 민간인 2만 등 한국인이 7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현지 신문에 한국군이나 한국인 관련 기사가 나면 부대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월남말을 배운지 1년도 안된 상황에서 신문 기사까지 번역한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종일 신문을 붙들고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을 했다. 다행히도 방첩대 타자수가 월남 처녀였는데 영어를 잘해서 그 친구에게 영어로 물어가며 번역을 하였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하니 나중엔 사전 없이도 신문번역을 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영어와 베트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니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역시 언어는 현지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후임도 보충되어 왔지만 어학실력이 차이가 나니 이미 부대 전체에서 나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당시 나는 사복근무를 하였고 권총을 차고 오토바이를 타고 경찰차도 배정되었다. 한마디로 비둘기 부대 유명 인사였고 다들 나를 어려워했다. 사병이었지만 통역수당도 받고 해서 장교 부럽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렇게 해서 업무에 적응할 즈음에 내가 전역할 때가 되었는데 막상 나를 대신할 후임자가 없었다.

이에 비둘기 부대 단장과 참모장이 나에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하며 좀 더 근무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현지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고심 끝에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하여 복무기간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사병으로 4년을 더 근무하게 되었다. 아마도 병장으로 4년을 근무한 사람은 대한민국 군대 역사에서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 호에 계속
재창간 3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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