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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전환점, 카투사 배치
기사입력  2017/12/21 [17:58] 최종편집   

 

▲60년대 교통


(
어르신자서전)<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3)

인생의 전환점, 카투사 배치

 

나는 추운 겨울, 찬바람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논산 훈련소로 배속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훈련소 입소 초기에 나는 29연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는 25연대에 배속되었다. 25연대는 보병연대여서 기초 군사훈련을 6주간 받고 보병훈련을 4주 더 받았다. 줄도 빽도 없는 나는 가장 평범하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고 있었다. 이대로 훈련을 마치면 평범한 육군 보병으로 군생활을 하게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평범한 길이 아닌 특별한 길을 열어주셨다.

 

훈련소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하루는 담당 주번 하사가 집합을 시키고 연병장에 1미터 간격으로 앉히고 기초 영어 시험지를 주고 풀라고 했다. 나는 군대에서 왠 영어 시험을 보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아는 만큼 써서 냈다. 당시에 그 시험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훈련소 막사를 지키기 위해 순번대로 막사를 지키게 되었다. 막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훈련을 하기 위해 나갔고 나는 보초로 남았다가 붙잡혀서 영어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대낮에 다른 훈련병은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았고 열외병력과 담당 주임병이 남아서 시험을 본 것이다. 그 시험은 카투사로 보내기 위해 특별히 배정된 이들을 위해 준비된 시험이었는데 특혜시비를 피하기 위하여 임의로 차출된 인력과 섞여서 시험을 보게 한 것이었다.

우리 내무반 동료 중 한명이 별 두 개인 장군의 아들이었다. 당시에 그 정도로 고위직의 자제들은 보통 후반기 교육을 받지 않고 좋은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그 친구는 평범하게 보병으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으니 좀 특이하다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에게 우리 아버지가 나를 카투사로 보내기 위해 여기로 보냈다.”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영어 시험을 보기 이전에 그 말을 들었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을 텐데 영어 시험을 보고 그 말을 들으니 뜻하지 않은 행운이 온 것 같아 안심도 되고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다. 말일 그때 내가 당번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 같이 훈련을 갔으면 카투사로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선발된 인원들은 영등포에서 GMC 트럭 한차에 24명씩 타고 부평에 있는 38 미군 보충대(ASCAM)로 이동하여 4주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조교는 미국사람이었고 모든 훈련은 영어로 이뤄졌다. 제식훈련 용어도 모르고 거의 들을 수가 없어 헤맸는데 1.2주 지나니 대강 알아듣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생활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나는 카투사 보충대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님을 만났다. 알고 보니 이분이 부대 인사과에 근무를 했었는데 제대 2개월 남겨둔 고참 병장이었다. 그분 덕분에 나는 집과 가까운 인천 월미도에 있는 부대로 배치되게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연결된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 미군에 와서 서양 문화를 접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가장 흔한 에피소드라면 당연 화장실일 것이다. 미군 화장실은 양변기였는데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화장실은 모두 재래식이라 쭈그려 앉아 변을 봤고 그것이 익숙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의자에 앉은 것처럼 변을 보려니 변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양변기 위에 올라가 쭈그려 앉아 변을 보는 훈련병도 있었다.

양식도 처음으로 맛본 것이었는데 늘 밥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던 우리가 갑자기 소고기를 구운 스테이크를 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류의 요리 자체가 처음이라 나이프질도 하기 어려워서 그냥 손으로 잡고 뜯어 먹었다. 거의 무슨 미개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한국군 조교하사가 보면 내무반에 들어가 품위를 손상했다고 얻어 맞는 훈련병들도 생기곤 하였다. 훈련받을 때 양식 먹는 법을 가르쳐 주는데 칼은 오른손, 포크는 왼손에 들고 먹으라고 했고 오렌지 주스, 커피 등 각종 음료수를 먹으면 반드시 나와야 했는데 또 먹고 싶으면 줄의 제일 끝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먹어야 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는데 거기에 아이스크림 위에 취향에 맞게 각종 토핑을 뿌려 먹게 되어 있었다. 토핑이 뭔지도 몰라 토마토케첩. 칠리소스 등 토핑이란 토핑은 다 뿌려 먹었다. 한 두 개만 취향에 맞게 뿌려먹어야 했는데 온갖 토핑을 다 넣었으니 당연히 맛이 떨떠름했다. 그렇게 먹었던 첫 아이스크림 맛은 너무도 이상했다.

 

그렇게 완전 한국 촌놈이 미군 부대에서 서양식 식생활을 접하면서 어느덧 그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사람은 어떤 환경이든 곧 적응되기 마련이니까. 카투사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당시 부모님은 학익동에서 용현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미군은 보급품으로 담배를 하루 한 갑씩 주었다. 나는 이것을 모아 외출시에 가져다 드리면 부모님들이 이것을 내다 팔았다. 양담배 1갑에 국산 파고다 3갑이 시세였다. 또한 월 1Ration box라고 생필품 주는 박스가 있었다. 여기에는 치약, 칫솔, 면도날, 담배, 과자 및 여러 생필품이 들어 있었다. 이 보급품은 쓰라고 준 것이지 팔라고 준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집에 보내주면 공개적으로 판매할 수 없어서 음성적으로 판매를 했었다.

(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 호에서 계속
재창간 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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