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자서전: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의 저자 최한준 님(3부)
재기에 성공해 노년에 꽃피운 인생
나는 양복점 단골손님의 소개로 공영토건의 잡부로 사우디로 가게 되었다. 1980년 6월 25일이었다. 기술이 없는 사람을 조공(助工)이라 했다. 가족들은 내가 중동으로 가는 것을 아쉬워했으나 그 누구보다 충격이 컸다는 것을 이해했기에 보내주었다. 1년 후, 나는 현지에서 샌딩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손기술이라는 것이 종류는 달라도 한번 해보면 금새 익숙해 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곧바로 익숙해 질 수 있었다.
그렇게 기술을 익힌 뒤에 두산그룹으로 옮겨서 정식 샌딩공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잡부와 샌딩공은 인건비 차이가 시간당 50센트 정도 났다. 샌딩공으로 일하면 하루에 17~18불 벌었다. 하루에 거의 1만원 이상 벌어 월 소득이 35만~40만원 정도였다. 양복점에서 벌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당시 신림동 1층 주택이 600만원 정도였다. 허름한 집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집이었기 때문에 2~3년 일하면 먹고살고 집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었다. 중동 특수는 우리 같은 서민들에겐 정말 엄청난 기회였다. 또한 국가적으로 보나 기업으로 보나 역시 대단한 도약의 기회였다.
그렇게 사우디 리야드에서 2년을 근무하고 83년 말에 귀국을 하였다. 1년 더 있으면 좀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께서 너무 연로하시고 나도 한국생활이 그리워서 2년 일하고 정리하여 귀국을 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죽으란 법은 없다는 것을 살면서 많이 깨닫는다. 처음에는 화재로 인해 죽을 것 같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있었고 거기서 일하면서 잃어버렸던 돈을 다시 다 회복하여 재기의 기틀까지 마련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째로 도전해 신림동에 GQ 양복점을 개업했다. 두 번의 실패를 통해 나는 더 단단해졌고 중동에 다녀온 뒤에는 세상을 보는 시야도 더 넓어졌다. 나는 지역사회에 정착하면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며 자리를 잡으면서 고객도 꾸준히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중저가에서 고급까지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맞춰서 제작을 해주고 고객관리도 성실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한번 다녀간 손님은 계속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고 다른 손님도 소개해주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아 갈 수 있었다. 나의 세 번째 도전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양복점은 최근 2014년까지 운영하다 정리를 하였다. 근 30년을 한 자리에서 한 것이다. 아마 나처럼 서울에서 한자리에 오랫동안 한 가지 업종으로 계속 일을 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50세 이후 시작한 건축업
양복점 단골손님 중 한분이 건축업을 했는데 나에게도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유를 하였다. 그래서 그분의 제안을 따라 지역에서 빌라를 짓기로 하고 처음으로 건축업을 시작해 보았다. 건축에 대해서는 80년대 초에 사우디에 가서 2년간 직접 잡부부터 샌딩공까지 참여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역시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 어떻게 그 경험이 사용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50대 중반이 다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해 볼만 하다 여겨졌다. 건축하면서는 낮에는 현장을 돌아보고 내가 해야 할 양복관련 일은 야간에 진행하였다. 밤낮없이 분주한 시간이 흘렀다. 열심히 한 결과는 좋았다. 드디어 내가 직접 지은 건물이 준공이 나고 분양을 하여 판매를 할 수 있었다. 건축업을 하면서 땅을 매입해야 하는데 나는 이 동네에 너무도 오랫동안 살아서 어디가 좋은 위치인지를 다 알고 있었다. 또한 시세도 거의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이지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랜 지인들이 많이 있어서 시공을 하면서 겪을 수 있었던 오류들을 최소화하며 진행할 수 있었다. 인허가 과정도 오랫동안 지역사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아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 자문을 받고 적법하게 잘 해결할 수 있었다. 건축은 일종의 종합예술과도 같은 분야인데 옷을 만드는 것도 다른 면에서 일종의 종합 예술가적인 자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잘 맞는 것 같다.
나는 자라면서 가족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삶의 고비마다 좋은 이웃과 지인들을 만나면서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노년에 확실한 일의 기반이 없이 건축업에 뛰어들었다면 불안함으로 인해 일을 그르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도 무리하지 않고 일을 차분히 진행해 오히려 결과도 잘 나오고 중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약 10년을 양복점 일과 건축업을 병행해 나가니 점점 자산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어떤 것은 지어서 팔고 어떤 것은 임대를 하고 수익을 받으니 계속 현금이 순환이 되어 사업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서 자산이 증가하여 3남매 모두 결혼을 시키고 아파트도 다 사주고 했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어디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것인가? 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도와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마움으로 남은 여생을 보내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 특히 빈곤 노인들을 위해 섬기며 보내고 싶다.
(최한준,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 희망사업단, 서울 2017)
자서전 제작자 해설
최한준 어르신은 2전 3기의 주인공이시다. 아주 가난한 빈농의 가정에서 나이 많으신 아버님의 독자(獨子)로 자라면서 초등학교 이후에 양복업을 배워서 평생을 양복 만드는 일을 하셨다. 20대, 30대에 두 번의 창업을 했으나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사우디 건설노동자로 2년간 나가 절치부심하며 재기의 발판으로 마련하여 40이 다되어 다시 세 번째 도전을 하여 결국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한 자리에서 30여 년간을 양복점 경영을 하면서 관악구 신림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공덕이 되어 인생 후반전에 지인을 통해 ‘건축업’에 발을 내딛게 되면서 자산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지면에는 다 소개하지 않았지만 부인께서 간 이식 수술을 받는 엄청난 일을 겪으시면서 지금까지 15년간 해로하며 살고 계시다. 인생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최한준님의 삶속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을 섬기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그 가족과 후손에게 전달되어 축복된 가정으로 성장해 나가길 기원해 본다.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