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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과 두 차례의 창업 실패
어르신자서전: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의 저자 최한준 님(2부)
기사입력  2017/10/13 [15:58] 최종편집   

 

▲어머님과 아내, 딸들과 아들

어르신자서전: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의 저자 최한준 님(2)

결혼생활과 두 차례의 창업 실패

 

1968년 여름, 좋은 날에 그녀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우리나이로 스무살이었고 나는 23세였으니 얼마나 젊었던가? 그녀는 청원군 대농(大農)집의 딸이었다. 형제가 8남매였는데 아들 다섯에 딸이 셋인 집의 둘째 딸이었다. 우리 집과는 정반대의 환경을 가진 집이었다. 사람마다 인연이 있다더니 그녀와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1968년 여름에 만나 그해 121일에 결혼을 하였다. 처가에서는 혼수도 부족함 없이 해오고 결혼식도 잘 치렀다. 당시 신혼여행은 온양온천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도 온양으로 가서 관광호텔이란 곳에 머물며 온양 유원지 등을 돌며 23일의 짧은 신혼여행을 즐겼다. 호텔이라 해도 지금 보면 허름한 여관 같은 것이었지만 당시엔 온양정도 가면 경제적으로 째이지 않는 여행이라 했다.

23세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독립을 준비했다. 내가 일을 시작하여 배운 형제라사는 청주시 남문근처에 있었다. 나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 서문동에서 양복점을 차렸다. 나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창업을 하여 치열한 경쟁을 치르면서 양복시장에 진출하였다. 사실, 경험도 다른 경쟁업체보다 적고 나이도 젊었지만 그래도 알음알음으로 영업이 되었다. 신혼 생활은 나의 지난 가난한 날과 학업도 포기하고 보조원부터 시작하여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 1년은 평화롭게 지나간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7014, 추운 겨울이었다. 연로하신 아버님께서 노환을 이기지 못하시고 70년에 소천하셨다. 늦은 나이에 5촌 당숙 댁으로 입양되셔서 고향을 떠나 청주에 거하시며 평생을 고생하시고 일만 하시다 결국 자식 결혼을 보시고 1년 정도 있다 돌아가시니 좋은 날 보지도 못하시고 가신 것이 안타까움으로 많이 남았다. 지난 10대의 시간들은 오로지 노()부모님을 모셔야 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좀 자리 잡을 만하니 돌아가신 것이 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같은 해 큰 딸 수연이 태어난다. 첫 딸은 요즘으로 치면 집안의 큰 자산이라 했는데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하늘이 내게 위로의 선물을 주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앞만 보며 달려왔던 나에게 청춘의 방황 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아버지께서 소천하시니 25세의 젊은 내가 가장(家長)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만 했던 것이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일만 했던 청춘이었는데 결혼하고 가장으로서의 삶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내심 무거운 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일에 집중하는 시간 보다 친우들과 어울리며 술을 먹고 즐기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주인이 늦게 나오거나 가게에 없으니 기술자들도 제대로 관리가 될 리가 없었고 손님들도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기에 잘 자리잡아가던 양복점은 71년이 되면서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결국 72년이 되면서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 지역에서 평판이 안좋게 되어 영업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하나, 둘씩 발을 끊기 시작하고 결국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거의 망하게 되면서야 인식을 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창업은 실패로 끝났다.

 

상경, 새로운 도전

 

나도 어느덧 20대 후반에 진입하였고 어린 딸이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일을 시작해야 했다. 아직은 젊었기에 낯선 곳으로의 도전이 두렵지는 않았다. 이에 아내와 나는 서울로 가기로 결단을 내리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수소문 해 본 결과 한 집안 분이신 큰아버님의 아들 한분이 서울 홍은동에 사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연락을 하게 되었다. 사촌형님이시지만 거의 아버님 연세와 비슷하신 분이셨다. 홍은동에서 한 6개월을 살면서 둘째도 생긴 상황에서 더 이상 방 한 칸에서 살 수는 없었다. 이에 이사할 곳을 찾던 차에 새롭게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신림동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당시 신림동은 수많은 판잣집들이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새로운 이주민 촌이었다. 누구나 시유지 땅에 슬레이트로 대강 집을 짓고 살아도 별 말이 없던 시절이었다.

1972년에 신림 5동으로 이사하였다. 신림동으로 이사 온 뒤에 드디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향 선배 한분이 을지로에 있는 프린스 양복점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마침 나와 연락이 닿아서 거기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나가 근무하고 아내는 부업을 했고 애들은 어머니께서 돌봐주셨다. 을지로에 있는 프린스 양복점에서 3년간을 근무하면서 서울 생활에 적응하였다. 나는 어느덧 4식구에 어머님까지 계신 5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신림동에 허름한 주택을 마련하고 조선호텔의 AQ 양복점에서 근무하다가 곧 광교 인근의 GQ 양복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GQ 양복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고향선배가 자기가 하는 양복점을 그만 두려고 하는데 싸게 인수하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인수를 하기로 했다. 이로써 서울에 온지 4년 만에 다시 나만의 가게를 갖고 운영하게 되었다. 1977년이었다. 그 양복점은 노량진에 있는 영도라사였는데 나는 초기에는 간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서 양복점을 경영하였다.

그러다 이후에는 마지막에 근무했던 양복점 이름을 따서 나도 GQ 양복점이라 하였다. 두 번째 도전을 할 때 내 마음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도 30을 넘었고 5식구의 가장이었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8년에는 우리집안의 장손이자 막내인 아들 부근이 출생했다. 어머니께서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손이 귀했던 우리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으니 기뻐하셨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셨으리라.

나는 양복점을 인수한 뒤에 오직 일에만 전념하였다. 가능한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여 비용도 줄이고 단골고객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 듯 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91230일 우리 가게에 불이 난 것이다. 당시는 전기설비에 대한 절연이 잘 안되어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던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었다. 옷과 관련된 업종은 화재에 특히 취약하다. 섬유, 옷감 등의 재질이 모두 불에 타기 쉬운 것이고 약간이라도 그을려도 상품성이 없으니 화재는 곧 파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성실하게 일하며 노력했던 모든 것이 한 번의 화재로 인해 다 날라가 버렸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도전도 70년대의 마지막 날에 한 줌의 재로 산화하여 버렸다. 다음 호에 계속

(최한준,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 희망사업단, 서울 2017)
재창간 2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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