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저널

NGO   아파트소식   동네소식   단체소식   사회   자서전   이사람   마을공동체   독서동아리   봉사활동동아리   마을공동체사회적기업
호별보기 로그인 회원가입
사회
NGO
아파트소식
동네소식
단체소식
사회
자서전
이사람
마을공동체
독서동아리
봉사활동동아리
마을공동체사회적기업
개인정보취급방침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사회 > 자서전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이상 큰 능력은 없다!”
어르신자서전<그분의 도우심>의 저자 윤옥순님
기사입력  2017/06/22 [17:37] 최종편집   

 

▲ 윤옥순님


어르신자서전<그분의 도우심>의 저자 윤옥순님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이상 큰 능력은 없다!”

 

내 어머니는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에서 1903329일 태어나셨다. 종갓집 10남매의 장녀로 태어나셨는데 아래로 8명이 남동생이고 1명이 여동생이었다. 모든 생필품을 직접 만들어 살던 시절, 어머니는 6세 때부터 물레질을 하였는데 물레가 너무도 커서 어른들이 물레바퀴에 아이가 따라 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1904년에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4남매 중 장남이셨다. 여동생 둘에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시대 직업이 측량사여서 늘 고향에서 떠나 집을 많이 비우셨기 때문에 형제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고향은 파평 윤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에서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연고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호주가 되셨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과 가옥 등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를 하셨다. 글공부를 하셔서 그 마을 전체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이 두 집 있었는데 한 집은 의사 집이었고 나머지 한 집이 우리 아버지셨다. 할머니도 유식한 집안 분이셨다. 할머니 여동생은 일제 시절 군수 부인이셨다. 나는 어릴 때 그분 댁에 가본 적이 있다. 평양 시내에 부자들만 사는 동네에 이모할머니가 사셨는데 소위 안방마님으로 사시면서 집에 일하는 여자들이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  가족사진(가운데 시아버님)

 

작은 아버지는 중국 봉천이란 곳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작은 어머니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윤영일이고 나와 동갑이다. 개원에서는 한 집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천재라고 했던 사람이다. 두 분 고모 중, 작은 고모는 딸이 둘 있었다. 그 옛날 파마도 하시고 높은 구두도 신고 다니시는 신여성이셨다. 당시 서울을 오가며 금을 거래하셨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16, 어머님께서 17세에 결혼하셨다. 그 때 풍습으로는 늦은 나이였다고 하신다. 같은 고향 이웃마을에 살고 있어 중매쟁이의 말을 통해 결혼하게 되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1920년에 결혼하셨다. 그때는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 북부를 통치했던 시기였다.

그때 중국으로부터 한 여자 선교사가 의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어머님께 큰 시누이가 밤에 교회로 구경을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거기서 램프 불을 처음 보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밤에도 밝은 세상을 처음보고 놀라신 것이다. 나중에는 아버지도 가게 되었고 부모님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얼마 후 교회에서 몇몇 사람들이 와서 사랑채에서 이야기 하더니 갑자기 안에 들어와 조상을 모신 사당을 바깥마당에 내어 놓고 불을 질렀다. 사당(祠堂)이란 조상들을 모셔놓은 장손 집에만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문틈으로 보고 떨고 있었고 이 일이 있은 뒤에 문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1939년 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으신 분이셨다. 그때 아버지는 36세셨다. 내 짐작에는 아버지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신문을 읽으시며 국제정세를 미리 짐작하셨다.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신 것이다. 이에 일본이 망하기 전에 만주를 떠나 우리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고향 의주가 아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으로 가셨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가시기에는 전에 기독교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 것이 부담이 되셨기 때문인 듯하다.

 

곽산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다. 그간 만주에서 양복점을 하며 모아두신 재산으로 집과 농지를 구입하셔서 지주가 되셨다. 훗날 사람들이 고향이야기를 하면 나는 마음속으로 의주가 아닌 곽산을 떠올렸다. 통일이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도 곽산이다. 내가 곽산에 살 때 일제가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어느 날 흰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읍내고 가는 길을 꽉 채우고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해방이 되자 38선 이북에는 공산당이 들어와서 장악을 했다. 우리 가족 생활권은 남쪽이 아니라 평안북도와 만주였기 때문에 이전에도 남쪽으로 간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사유재산이 부정되고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제일 처음 한 것이 숙청 작업이었다. 숙청은 소위 반동으로 몰아서 그 사람이 소유한 집과 땅을 빼앗는 것이다. 예고 없이 쳐들어와서 무조건 집을 내놓게 하였다.

 

1948년 이남에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취임을 하였다.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역시 수립되었다. 당시 남한의 인구는 20,160,675명이었다. 2016년 현재를 기준으로 반도 안 되는 인구였다.

 

우리 가족이 모두 한 곳에서 만난 곳은 원효로 294번지였다. 서울로 먼저 내려온 큰 오빠는 우리가 한강을 통해 올 것으로 생각하고 3개월 동안 날마다 한강으로 우리를 마중 나갔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몇 개월에 걸친 시도 끝에 모두 만나게 되었다.

 

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해방촌이다. 월남하여 남한에 온 인구가 점점 늘어나 해방촌이라는 동내가 생겼다. 그때에 유행하던 말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구한 원효로의 집에서 살았는데 오빠는 이제 방이 2개짜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집을 사서 해방촌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나는 해방촌에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살았다.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문정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수원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때는 교통편이 너무도 나빴다. 수원에서 용인으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오갔다. 교통이 불편하여 방학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있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1964년 우리나이로 27세에 결혼을 하였다. 당시는 용문동에 살 때였다. 25세만 넘어도 올드미스라 불렸던 시기에 계속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백경도 권사님의 중매로 용산제일교회의 이강수 씨(30)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으니 결혼이란 것이 참으로 희한한 것이라 생각된다.

 

네 딸들은 다 결혼했고 시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편도 8년 전에 먼저 소천 하니 그 많은 사람이 북적대던 집에는 이제 나 홀로 남아있다. 그렇게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8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았다. 인생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믿음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내 딸들이 살아갈 미래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어머니가 살아온 1903~1995년의 90여년의 세월에는 얼마나 고달픈 일들이 많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 인도, 위로, 도우심이었다. 앞으로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이상의 큰 능력은 없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다. 이것이 자서전을 기록하게 된 중요한 동기이다.

 

[윤옥순, 그분의 도우심, 희망사업단, 서울, 2017]

 재창간 289호 

 

ⓒ 관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미투데이 미투데이 페이스북 페이스북 요즘 요즘 공감 공감 카카오톡 카카오톡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주간베스트 TOP10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44길 35 대표전화 : 02-889-4404ㅣ 팩스 : 02-889-5614
Copyright ⓒ 2013 관악저널. All rights reserved.
Contact webmaster@linuxwave.ne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