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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의 전설, 프레디 머큐리
■성지인의 음악세상
기사입력  2016/08/24 [17:15] 최종편집   

 

▲열창하는 프레디 머큐리. 좌로부터 두번째 퀸의 프레디 머큐리


성지인의 음악세상

Queen의 전설, 프레디 머큐리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하나 해보자. 록 오페라 분야에 있어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영국의 슈퍼밴드 Queen의 멤버들 사이에서 잦은 불화가 발생해 보컬리스트인 프레디 머큐리가 그룹을 떠나고, 해체를 원치 않는 나머지 3명의 멤버들은 가창력 끝내주는 다른 보컬을 구해 새 음반을 내고 그룹의 건재를 과시하는 순회공연에도 나선다. 음악상식이 수준급인 독자들 생각에 이들의 새 앨범은 얼마나 팔릴 것 같으며, 라이브 공연을 직접 보러 오는 유료관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독자들의 예상 정답은 제기랄, 망했다.” 이 정도가 될 듯하다. 이는 예상 정답이 아닌 사실상의 모범 정답인 셈이다.

 

지난 199111월 프레디 머큐리가 불과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남겨진 세 멤버들은 그룹 재건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이 Queen의 해체를 뼈아프게 받아들였던 이유도 프레디 머큐리라는 걸출한 보컬리스트 없이는 그룹의 존재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퀸의 멤버 존 디콘(베이스)은 프레디 사망 이후 음악 활동을 중지하고 은퇴했으나 나머지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기타)와 로저 테일러(드럼)2004년부터 5년 동안 영국의 실력파 록그룹 배드 컴퍼니(Bad Company)의 리더인 폴 로저스를 보컬로 내세워 'Queen+Paul Rodgers'라는 이름으로 순회공연을 가졌다. 브라이언과 로저는 지금도 퀸의 이름으로 음악활동을 지속하지만 퀸을 아끼던 예전 팬들로부터 자신들의 명성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해체하는 게 나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특유의 화려한 퍼포먼스로 공연마다 관중을 사로잡던 프레디 머큐리는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라는 인도식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 잔지바르(탄자니아) 출생이다. 아프리카 출생이면서도 흑인이 아닌 이유는 그의 먼 조상들이 페르시아에서 무슬림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건너온 조로아스터 교도들이었고, 인도에 정착한 파르시(아랍)족의 역사를 계승해온 그의 부친과 일가들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잔지바르로 이주해 정착한 때문이다.

 

성장기 교육을 인도 뭄바이에서 유학한 그는 1964년 발생한 잔지바르 사태로 흑인을 제외한 아랍, 인도계 및 아시아계의 대학살과 추방조치에 따라 잔지바르를 식민통치했던 영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잔지바르는 탕카니카와 합병되어 지금의 탄자니아로 국호가 바뀌고, 영국 총독부 공무원 생활로 윤택했던 가족은 재산몰수 및 추방으로 궁핍에 몰리며 프레디 역시 영국 일링예술대 컴퓨터디자인 과정도 어렵게 마쳤다.

 

유명 음대에서 성악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거니와 카스트라토도 아닌 그였지만, 4옥타브라는 음역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록 오페라 그룹의 역사를 만든 주인공이자 퀸이라는 그룹명, 퀸의 엠블럼, 퀸의 음악적 정체성 등을 도맡았던 프레디 머큐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Queen 그 자체였다. 록 뮤직의 3대 명반의 하나로 불리는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보헤미언 랩소디,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의 히트곡들이 프레디가 만든 작품이다. 그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악보맹이었지만 그만이 아는 특이한 부호로 악보를 대신하고 작곡하는 능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음악을 좋아하던 프레디는 일링대 재학 중 몇몇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 다니다 팀 스타펠,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가 활동하던 밴드 스마일'에 마음이 끌려 한동안 그들의 지역 공연을 보러 다니다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러다 팀 스타펠이 다른 밴드로 옮기면서 생긴 보컬의 빈자리에 프레디 머큐리가 불려갔고, 이후 프레디는 베이스 주자 존 디콘을 오디션으로 영입해 4인의 라인업을 갖추면서 Queen이라는 그룹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방인의 느낌으로 인해 통성명도 꺼리던 파로크 불사라도 영국식인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로 공식 개명을 하게 되었다.

 

1970년에 결성된 퀸은 멤버들 모두가 가난한 상태라 공연 연습에 필요한 장소 물색도 여의치 않았다. 이들의 살림살이는 데뷔 5년이 지난 75년 발표한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가 영국 차트에서 9주간 1위를 차지하면서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을 정도다. 특히 퀸은 라이브 무대에서의 오페라 부분을 커버하기 위해 무대 스크린에 동영상 영사기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뮤직 비디오의 시초가 되었다.

이듬해인 76년 발표한 ‘Somebody to Love’도 영국 차트 2, 미국 차트 13위에 올랐다. 77년 공개돼 영국 차트 2, 미국 차트 4위를 기록한 ‘We Are The Champions’는 이후 30여 년간 온갖 스포츠 경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원한 고전이 되면서 Queen은 명실상부한 음악기업으로, 멤버들 각자는 호화로운 대저택을 소유한 부호들이 되어 있었다. Queen은 거칠 것이 없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곡은 물론 공연장은 그들의 모습을 보러오는 관객들로 날마다 매진되었고 인상적인 의상에 특유의 퍼포먼스, 화려한 무대조명은 이들의 라이브 무대를 보러온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각국에서 밀려드는 공연요청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몇 년 동안 활동이 뜸하다 싶었던 19911123, 영국 일간지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에이즈 투병사실을 앞 다퉈 보도했지만 그 다음날 지면에 프레디 머큐리 오늘 사망하다라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 세계의 음악팬들은 경악했다. 개인 대변인을 통해 에이즈 투병을 공식 발표한 그 다음날 프레디가 눈을 감은 것이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이어서 에이즈 감염은 곧 시한부를 의미하는 냉혹한 사형선고였다. 그는 양성애자였고 이 사실 때문에 종종 호모로 공격받는 등 신문의 가십꺼리에 오르내리곤 했다.

 

세계를 흔들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추모 공연을 개최했다.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퍼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만든 'No One But You'를 끝으로 프레디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Queen의 탈퇴 및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사망 이후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부모는 종교 관습에 따라 프레디의 사체를 조각내 독수리에게 던져주는 조장(鳥葬)을 원했으나 주변의 극심한 반대로 결국 화장했고, 프레디의 골분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프레디가 자주 방문했다는 스위스 몽트뢰에는 로잔호수를 향해 멋진 공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의 동상이 프레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안겨주고 있다.

 

오페라를 좋아했던 그가 직접 만든 Queen의 보헤미언 광시곡은 세익스피어 희곡을 읽는 것 같은 명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해한 가사에 담긴 은유적 의미는 프레디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문장이 주는 일차적 의미보다 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프레디 머큐리는 4옥타브의 넓은 음역대와 특유의 무대 매너로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 (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프레디 머큐리 하면 절로 떠오르는 유명한 어록이 하나 있다.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나는 록 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전설이 될 것이다.) 라는 근사한 말이 그것이다.

 

짧은 머리에 진한 콧수염, 피아노에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뻐드렁니 사이로 뿜어 나오는 아름다운 사자후. 그의 바람대로 전설이 된 프레디 머큐리. 오늘따라 그가 참 그립다.

 

이게 현실의 삶인가, 아니면 환상일 뿐인가? 산사태속에 갇힌 것처럼,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어. 당신의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라. 난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아이,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난 그냥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가버릴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존재. 어디서 바람이 불어 닥치든 간에, 내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엄마, 사람을 하나 죽였어.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어. 내 삶이 시작 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스스로 내팽개친 꼴이 돼버렸어.” (Bohemian Rhapsody )

 

(최기만/팝컬럼니스트)

 

(캡션)

무대에서 We are the Champians를 열창하는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

좌로부터 브라이언 메이(기타), 프레디 머큐리(보컬, 피아노), 존 디콘(베이스), 로저 테일러(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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