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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청년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故 유선익 님 5부
기사입력  2016/07/22 [22:45] 최종편집   

 

▲노년의 저자부부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유선익 님 5

방랑 청년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

 

한국전쟁은 한민족의 생활 터전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큰 사건이었다. 특히 38선 이북에 살던 분들 중 자유를 찾아 남하해 온 분들은 더욱 그렇다. 유선익님도 연고 없는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산까지 피난을 하며 연고 없는 낯선 곳에서 미군과 연계된 일을 하며 작은 성공과 실패를 맛보았다. 서울 수복 이후 미군이 서울로 올라가니 부산지역의 미군을 기반으로 한 경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여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청년 유선익이 차린 미군과 댄스홀 직원 들을 대상으로 한 레스토랑은 곧 폐업을 하게 된다. 이후에 차린 인도 카레 전문점 역시 큰 자금을 들였으나 상권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여 다시 폐업하게 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점에 잘못된 대응을 한 것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술회한다.

 

남들은 서울이 수복되어 많은 인력이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남아서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바보였던가! 결국 인도 카레 전문점은 개업 동시에 폐업했고 거기서 있는 것을 다 털리고 말았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내가 너무도 조급하게 판단한 것이 잘못이었을 뿐이니 결국 무일푼으로 부산에 와서 무일푼으로 떠나게 되니 쓸쓸한 마음뿐이었다. 이때 나이 32세였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66)

 

▲ 젊은 시절의 저자


이후 저자는 빠른 승진을 한 친구들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끼며 사범학교 나온 것을 기반으로 전국 각 지방에 흩어진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무전여행을 하였다. 그러다 한 친구가 소개한 오연숙이라는 분을 만나 결혼을 하여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결혼은 몇 년에 걸친 방랑을 끝내주는 특효약이었던 것이다.

 

196037세라는 늦은 나이에 좋은 배필인 오연숙을 만나 가정을 이루어 나의 방랑 생활도 종식되었다. 이듬해에 장녀 유영희(1961. 5. 29.)2년 뒤에 차녀 유정희(1963. 8. 16.)를 낳았다. 이제는 안정된 직장에서 가장의 시기를 살게 되었다. 이에 나는 6212월 대한통운 인천지점에 입사하였다. 당시 대한통운에는 내 친구인 최영규가 사장으로 있었고 동경성 발해학교 동창생인 이재기가 인천지점장으로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천지점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76)

 

저자는 인천에서 시작한 대한통운 근무가 매우 즐거웠다. 일을 즐겁게 하니 업무 성과도 좋았던 것 같다. 이에 부산으로 가서 기획계장이 되며 물류업에 대한 기본 소양을 습득한다. 여기서도 과거 전쟁 중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인생의 다양한 경험은 어디에서 어떻게 쓰여질 지 모르는 것이다.이후 입사한지 4년 후 천안지점 산하 홍성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이것도 주변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예산영업소장으로 일하게 된다. 여기에서 예산 군수와 바둑을 두면서 새로운 친분관계가 형성되어 영업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적자 점소를 흑자점소로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있다가 예산 영업소장 자리를 떠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다 다시 인천지점으로 와서 거의 이직을 고민하던 차에 춘천지점으로 추천하여 춘천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원주지점 산하의 함백출장소를 인수하게 된다. 춘천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렇게 저자는 53세에 독립적인 점포를 운영하며 특유의 경영 수완을 발휘하여 작은 성취를 거두게 된다.

 

인수 당시 월 매출 60만원이었고 작업 노임이 2만원 선이었는데, 석탄공사에서 노임을 정상화해주면서 월 매출이 700만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관리비 내고 운수노조 퇴직금, 후생기금 내고 작업원을 다 충원해도 지출이 한 100만원 정도였다. 그러니 나에게 떨어지는 돈이 200만원 정도 되었다. 지점 과장, 본점 대리 2급 을류 봉급이 12만원일 때였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98)

 

함백출장소를 인수한 저자는 1977년 함백터널 공사가 착공되면서 특별한 행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14개월간 진행된 대형 토목공사를 통해 큰 돈을 벌면서 지역 유지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나에게는 특별한 행운이 찾아왔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9773월 함백터널 공사가 착공된 것이다. 이후 만 12개월간 진행된 대형 토목공사가 내가 함백출장소장으로 재직 시에 진행되었다. 함백터널은 함백역과 사북역을 연결하는 터널인데 사북역이 고지여서 터널을 직선으로 파지 못하고 나선형으로 돌아서 가게 되었는데 그 길이가 무려 14km나 되는 한국 최대의 터널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시멘트, 모래 등 골재가 모두 함백으로 오게 되었고 이 작업은 함백통운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104)

다음 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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