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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안영혁의 힐링칼럼
기사입력  2016/07/20 [22:57] 최종편집   

 

▲안영혁 목사


(안영혁의 힐링칼럼)

안보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안전을 보호하는(안보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 대통령과 국방장관과 모든 국방 실무자들과 여당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이 힘이 사드에서 온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야당에서도 많이들 동조한단다.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국민들이 하나도 걱정할 것 없는 일을 가지고 심약하여 걱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로서는 그것을 힘의 논리를 따라 반론할 생각은 없다. 대통령의 말이 맞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주변의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다 외교적 무리에다 안보의 위험에다 득이 없는 일을 하는 거라고 말한다. 이럴 때는 대통령을 믿는 것이 국민 된 도리이지만, 평소의 여러 정황들을 생각할 때 그렇게 믿기가 어려워서 우리는 모두 심약하게도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정말 소박한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문제인지 심각히 물어보게 된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보호하는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필자는 목사라서 교회사의 한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 북방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아서 그야말로 무너질 수밖에 없던 그 로마의 한 귀퉁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평화에서 나오며말하자면 인간으로서는 그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살아낼 희망으로 나가면 된다고 보았다. 그 당시로서는 로마가 저 야만족을 감당할 무력 자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이야기는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실로 그의 그런 정의와 평화의 이야기에 기대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야만족은 널리 자리를 잡았지만, 마침내 다가온 로마 멸망 후에도 정말 기독교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회를 지배했고, 로마가 무너졌어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삶을 유지하였다. 이것이 안보의 힘이라는 교회사적 사실을 필자는 배웠다.

 

현대에는 베트남의 예가 있다. 프랑스도 미국도 일본도 또 중국까지 자신들의 위력과 이익만 추구했고 많은 무력을 쏟아 부었지만, 베트남은 국민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지켜냈다. 프랑스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큰 틀에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신화적 전략가 지압은 무력으로 전쟁을 했다기보다는 국민들의 힘으로 전쟁하였고 전쟁에서 이겼다. 비록 전쟁을 하더라도 전쟁을 이기게 하는 힘조차도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아주 가까운 시대의 교훈을 우리는 얼마나 가까이서 겪었는가?

 

여기서 국민의 힘과 종교적 정의 평화 중에 어느 쪽이 더 힘이 있는가를 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같이 간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안보를 지켜내는 힘은 국민이라는 존재와 정의와 평화라는 국민들의 가치에서 온다는 것이다. 과연 통치자와 정치가는 무엇을 믿고 어떤 힘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 정치가 아무리 현실적인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 근저에 있는 이 국민의 존재와 국민이 가진 가치를 나 몰라라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따는 당장의 안보는 시급하고 저 국민의 존재와 국민의 가치는 먼 데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안보는 촉급하고 우리의 생명은 짧으며 유구한 평화는 당장은 힘이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체 긴 역사는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이 평화의 안보 정신을 물려줄 수 없는데, 사드로 과연 지킬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입술과 얼빠진 전략가들의 영혼 없는 잔꾀들에 의존하게 할 것인가?

 

통치자는 말하자면 지속 가능한 안전 보장의 정신으로 국가를 세워가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을 믿고 통치자와 정치가를 세운 것이 아닌가? 더 약한 쪽이라도 악한 마음을 먹으면 결정적으로 서로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오늘을 살면서 대체 통치자와 정치가들은 무슨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들은 너무 현실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국민의 소리를 들을 때이다. 국민은 지금 통치자가 국민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기다린다. 깡패들의 폭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신을 담아내는 가치가 살아서 요동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대체 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국민의 존재인가, 무기의 존재인가?” “정의와 평화의 정신인가, 아니면 허접한 군사적 전략적 계산들인가?” 답은 이미 분명한데도 다른 이야기가 나도는 것은 통치자와 정치가들이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것 아닌가? 답하라.

 

안영혁(예본교회 목사, 총신대학교 교수)

재창간 2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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