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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故 유선익 님 1부
<대한인(大韓人)의 방랑과 사랑> - 공룡발자국 같은 기억들의 저자
기사입력  2016/05/16 [14:46] 최종편집   

 

▲사도학교 시절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유선익 님 1

<대한인(大韓人)의 방랑과 사랑> - 공룡발자국 같은 기억들의 저자

 

20156, 전국이 메르스라는 신종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올해로 다섯 번째 자서전 제작에 대한 계약을 수행하였으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초조함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연락이 왔다. 아버님의 자서전을 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서전 제작은 대부분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진행되지만 약20%정도는 자녀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문제는 자녀들의 의사와는 달리 당사자 분들이 고사하는 경우가 많아 틀어지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무조건 당사자를 만나서 결정을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날씨가 매우 더운 어느 날 따님과 약속을 하고 어르신 댁으로 찾아뵈었다. 이것이 유선익(劉善益) 어르신과의 첫 만남이었다. 1923년생, 우리나이로 93세이셨다. 지난 5년간 자서전을 제작한 이래 최고령자셨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잘 걷지 못하셨지만 친히 문 앞까지 나와서 맞이해 주셨다. 첫 만남에서 어르신께서 거절하시면 제작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르신께서는 고령이시라 작업이 가능할 지 필자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자서전 계약은 어르신들과의 대면 접촉으로 이뤄지는데 첫 인상에서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선익 어르신과는 통성명을 하는 데서 풀어졌다. 필자의 이름이 유명종이라 말씀드리면서 명함을 드리니 어디 유씨인지 물으셨다. 그렇게 대화가 진행되면서 같은 종친임이 밝혀졌고 갑자기 분위기가 화기애애(和氣靄靄)해 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론에 이렇게 담담히 기록하셨다.

 

이제 내 나이 70도 아니고, 80도 아니고, 90하고도 3년을 지났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으로써 90여 년은 짧은 것이 아니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 같이 흘러갔지만 생각나는 것도 없고 생각나는 것이 조금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다 후회스럽고 자랑할 것 하나 없으니, 나 자신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기 싫으니 자서전 같은 책 쓰고 싶지 않다고 다시 권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10여 일이 지난 후 다시 관악구청에서 지원하는 사업으로 자서전 제작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하니, 기록하기 어려우면 구술로 해도 될 것이라며 제작자를 만나보라 한다. 그리하여 2-3일 후 한 사람을 동행하고 왔는데, 성이 유() 씨라 나와는 종친간이고 몹시 친근감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결심하고 지나간 긴 세월을 말하고자 하였으나,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말을 맺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희망사업단 대표 유명종에게 내 필재 없으니 걸어온 내 생애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을 유명종 대표가 올 때마다 말하기도 하고, 또 붓이 돌아가는 대로 쓴 것이 두어 달이다(유선익,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희망사업단 2016, 서울. 14)

 

어르신과의 첫 만남 이후에 두 번째 방문하면서 부터 정식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1923년 함북 경원에서 출생하셨다. 하지만 원래 어르신 부모님의 고향은 평북 성천이었다. 그리고 다시 중국 동경성으로 가신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평북, 함북 모두 생소한 지역에 군 이름도 생경하였다. 1945년 이전에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하나의 생활권이었음이 어르신 가족의 발자취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80여 년 전 어린 시절 듣고 보았던 일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시는 것이 신기했다. 자서전 제작을 하면서 늘 겪었던 일이지만 역시 고령이시라서 더욱 그랬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검색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엔 지명에 대한 것이었다. 말씀 중에 해삼...’으로 간다고 하셨는데 잘 못 알아 들었다. 나중에 와서 검색해 보니 해삼위(海参崴)’였고 블라디보스톡의 중국식 명칭이었다. 어르신 가족이 평북 성천에서 함북 경원으로 이주하시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일대 토목, 건설 공사가 붐 이였던 것 같다. 이에 어르신 부모님께서 작업팀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둘째는 고향에서 겪었던 일종의 소외였다. 당시는 거의 씨족 중심의 집단 취락을 이루며 살았는데 숙부님 댁이 부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소작을 박하게 주면서 어르신의 모친께서 큰 상처를 받은 것에 기인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동산과 재산에 대한 문제는 가족 불화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어르신께서는 4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이미 형님들은 연해주에서 일을 하러 가셨고 일을 마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북 경원에 정착해서 어르신을 비롯한 3남매를 더 낳으셨던 것이다. 거기서 정착하면서 창업한 것이 평양여관이었다. 반짝 경기가 좋은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시던 어르신을 보면서 어린 자녀와 부모의 관계, 그리고 국제 정세가 한 개인의 가족사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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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16/05/26 [04:04]
유선익 어르신 큰딸 유영희입니다. 관악저널에 저희 아버지 자서선 이야기를 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와봤습니다. 위의 기사는 2015년 6월 중순쯤 첫 대면 때의 일이네요. 만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집니다. 제 마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1월에 멈춰있어서 마치 그 이전 시간은 삭제된 기분이었나봅니다. 그날 현관에 들어서시고 아버지가 마중하던 모습이 눈에 그린 듯 선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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